제4코스 : 신라 왕경

[제4코스]신라 천년 도읍지 ! 경주의 영광과 함께하는 길 !!! 서신라 왕경

  • 화랑교육원⇒10 분황사[20]~10 황룡사지[30]~5 (경주 황룡사역사문화관)~15 동궁과 월지[30]~5 (신라왕경영상관)~5 월성, 석빙고[30]~10 계림[25]~5 향교[20]~5 최부자댁[20]~5 (월정교)[10]~10 첨성대[15]~5 대릉원(천마총, 황남대총)[30]~10 노동· 노서동고분군[20]~5 (신라대종)~5 쪽샘유적박굴관[30]⇒ 20 화랑교육원

※ 도보 ~분 / 차량 ⇒분 / 유적지 내 체류 시간 [  ] / 중식 장소 밑줄

지도

답사 개요

  • 신라 왕경 중심지에 위치한 분황사와 황룡사지를 통해서 신라 불교 문화의 단면을 학습하고자 한다. 월지와 석빙고 그리고 계림, 첨성대를 통해서 신라 문화의 일부를 알게 될 것이다. 또 대릉원과 노동 노서동고분군 및 쪽샘 유적발굴관을 이용하여 신라의 대표적 묘제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과 관련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게 한다.

유의 사항

  • 도로를 횡단하거나 따라 걷는 경우가 있으므로 교통규칙을 잘 지키고, 안전에 유의하도록 특히 주의합니다.
  • 점심과 물과 간식을 반드시 준비합니다.
  • 풀숲을 통과할 수도 있으므로 운동화에 긴바지를 착용합니다.
  • 유적 유물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 관찰합니다.
  • 의문은 인터넷이나 해설사를 이용하여 해결하도록 합니다.
  • 몸에 문제가 있을 때는 재빨리 인솔교사에게 말씀드려 해결합니다.
  • 발굴현장에서는 책임자의 허락을 받은 후에 관람합니다.

 

1. 경주 분황사  

과거불 시대 일곱 곳 가람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선덕여왕 3년(634년) 용궁의 북쪽에 건립하였다. 창건 10년 뒤에는 중국에서 돌아온 자장법사가 머물렀다. 또 원효는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교학은 이 절을 중심으로 널리 펴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상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은 아버지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다. 언젠가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 원효의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왼쪽 건물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755년(경덕왕 14년)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안하였는데, 그 무게는 30만 670근으로 만든 사람은 본피부의 강고 내말이라는 사람이었다.
고려시대 1101년 (숙종 6)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 원효 화쟁국사의 비가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비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원효에게 대성 화쟁국사(大聖 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화쟁국사비의 비편은 지금도 가끔 발견되고 있는데 비신을 받쳤던 비대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어 추사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였다. 비대 한 켠 에는 지금도 “차 신라 화쟁국사지비부 김정희(此新羅和諍靜國師之碑趺 金正喜)”라는 추사가 확인하고 남긴 글씨가 있다.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 등으로 이 절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그 뒤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있는 건물로는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과 승방, 종각 등이 있으며, 국보 제30호인 분황사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석정(石井 돌우물) 등이 있다.
이중 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만이 남아있다. 벽돌 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었다고 한다. 그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해서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하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 탑 옆에 있는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이라고 전해진다. 우물 틀의 외부는 8각이고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8정도(正道 바른 길)와 원융의 진리를 뜻한다고 한다.
발굴조사는 3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1차로 1975년 2월 8일부터 18일까지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실시되었고, 2차는 1975년 11월 8일부터 12월 4일까지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조사에서 금동보살입상과 귀면기와, 신라 및 고려시대 기와 등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발굴은 보광전 주위만 하였던 관계로 서향한 건물지의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법당터만 확인하고 절의 방향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17년 뒤 1992년 4월 21일에서 9월 22일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제3차 발굴을 실시한 결과 분황사의 가람배치가 1탑3금당형식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즉, 품(品)자 모양 가람배치로써 이는 신라문화권에서는 처음 밝혀진 것이다. 옛 고구려지역에서 밝혀진 品자 모양 가람배치는 세 개의 금당 정면이 모두 탑을 향하고 있는 반면 분황사는 탑을 중앙 금당 앞쪽에 두고, 세 개의 금당 모두 남향하고 있는 것이 고구려와 다른 신라적인 특색이다. 또 이 가람배치는 오랜 기간을 지나면서 1탑3금당에서 1탑1금당으로 변하는데, 중앙 금당은 창건 이후 같은 자리에서 최소한 3차례 확대 또는 축소되면서 방향도 남향에서 서향으로 바뀌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1965년 12월 분황사 뒷담으로부터 30m 떨어진 우물 속에서 석조 좌불상 13구, 석조 보살입상 1구, 석조 부처 머리 5점, 석조 광배 1점 등이 출토되었다. 이 불상들이 출토된 곳은 우물이지만 원래는 분황사의 강당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또한 이 불상들이 모두 목이 잘린 채 우물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불교를 배척한 사상의 영향으로 경내에 있던 석불들을 모두 우물에 넣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 후 이 우물을 매몰하고 경작지로 만든 듯하다. 이 불상군은 분황사라고 하는 한 절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조각품으로써 당시 분황사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조각파가 존재하였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현재 이들은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함께 전시되고 있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분황사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그림

그림은 모전석탑 주변의 축대 기단의 일부이다. 이런 수법을 무엇이라고 장점은 무엇인가를 말해 보세요.
 

3

모전석탑 주변에는 네 모퉁이에 돌사자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동남쪽과 동북쪽의 돌사자는 엎드린 자세로 물개처럼 생겼습니다. 이들 돌사자는 원래 한 세트였을까요?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하나를 선택하고 그 이유를 말해 보세요.

4

분황사석탑을 '모전석탑'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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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주 황룡사지  

(사적 제6호)

신라 제24대 진흥왕 때 처음 세웠던 사찰터로 사적 제6호이다. 황룡사는 진흥왕이 나이 7세에 왕위에 올라 21세 되던 해인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궁궐대신 사찰로 고쳐 짓게 되었고, 그로 인해 황룡사(黃龍寺)라 이름 하였다. 553년에 짓기 시작하여 569년에 주위에 돌담장을 둘러 경계를 마련하여 일단 사찰의 기본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574년에 5m가 넘는 주존불[장육존상]을 비롯해서 금동삼존불을 만들고, 이 삼존불을 모시기 위한 금당을 10년 후인 584년(진평왕 6)에 세웠다.
황룡사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0년대에 들어서 본격화되었다. 문화재관리국에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결성되고, 1976년 6월부터 발굴조사에 착수하여 1983년 12월까지 8년 동안 진행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터를 마련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사찰의 건물배치는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일직선으로 배치되고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추가된 이른바 1탑 3금당식 가람배치를 기본으로 하였다. 탑의 전방 좌우 대칭의 위치에 종루와 경루를 마련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강당의 좌우에도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음이 밝혀졌고, 동서남북으로 마련된 회랑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상태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도 이 절은 규모면에서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음이 확인되었고, 9층목탑 또한 그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다. 또 목탑지의 심초석 아래에서 발견된 작은 백자 항아리는 당나라 제품으로 밝혀져 당시의 문물교류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높이 182cm, 최대 너비 105cm되는 초대형의 치미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어 동양 최대의 치미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렇게 큰 치미가 사용된 건물이라면 그 웅장함도 대단하였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금당 건물의 벽에 솔거가 그린 노송도(老松圖)는 얼마나 사실적이었기에 날아가는 새들이 진짜 나무로 생각하고 앉으려다 벽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고 전한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황룡사지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황룡사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황룡사지 목탑 심초석의 덮개돌은 원래 탑이 있을 당시에는 없었고, 몽골군들에 의해 불타고 난 후에 사리장치가 노출되자 돌을 옮겨 덮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래 탑의 심초석 덮개돌은 탑에 사용되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불타고 옮겨진 것일까요.

3

황룡사지 주춧돌을 통해 건물배치의 특징을 설명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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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주 황룡사역사문화관  

&황룡사역사문화관은 황룡사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한 축소 모형을 이용하여 이해를 돕기 위한 시설이다. 1층에는 황룡사 9층 목탑의 1/10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2층에는 학자마다의 황룡사 9층 목탑 모형을 절단면으로 만들어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황룡사와 관련된 유물의 모형 등을 통하여 황룡사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황룡사지 9층 목탑 1/10 모형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황룡사 9층 목탑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3D 영상실에서 상영물을 감상한 내용에 대하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3

2층 전시실에서 관람한 내용에서 고쳤으면 하는 내용이 있으면 각자 의견을 제시하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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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주 동궁과 월지  

(사적 제18호)

경주시 인왕동 26번지에 있는 사적 제18호이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왕궁터인 월성의 동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동궁의 확실한 모습은 오늘날 확인할 길이 없으며, 발굴된 건물터로 추정만 할 뿐이다. 월지의 창건 연대와 명칭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창건연대에 대해서 첫째, 신라 제30대 문무왕 14년 2월인 674년 설, 둘째, 문무왕 19년 8월의 679년 설을 꼽을 수 있다. 학계는 두 견해 중 대체적으로 674년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으며 『삼국사기』 기록 방법과 출토된 유물을 고려할 때, 오히려 679년 설을 신중히 검토하여야 할 것이라 중장하기도 한다. 출토 유물 중 의봉 4년(679)이라는 연호가 찍힌 기와, 그리고 조로 2년(680)이란 연호가 쓰여 진 벽돌이 출토 되었는데, 이것은 공사가 679년에 시작하여 680년에 완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월지라고 하는 큰 연못을 일이 년 만에 파고, 주변에 건물을 짓기까지 걸린 기간이 고작 이 년이라 보기에는 너무 짧기 때문에 674년 설을 믿는 학자들이 많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동궁과 월지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동궁과 월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그림은 월지를 발굴할 당시 세 개의 섬 가운데 제일 작은 섬을 실측한 것이고, 사진은 현재 호안의 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이렇게 못 둘레에 일정한 간격으로 바윗돌을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토론하고 기록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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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경주 월성  

(사적 제16호)

경주 월성

월지 서남편에 있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왕궁이었으며 사적 제16호이다. 흙과 돌로 쌓은 도성으로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건물지가 있다. 이러한 신월성은 경주 시가지를 중심으로 보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주시 인왕동 449-2번지이다. 남천(문천 또는 사천) 북쪽에 접한 낮은 언덕을 연결하고 자연 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성곽의 형태가 반월형(사실은 초승달 모양)을 이루고 있다. 동쪽, 서쪽, 북쪽은 낮은 12개의 산봉을 연결하여 쌓았고, 남쪽은 자연 지세를 많이 활용하여 쌓았는데, 지형이 절벽을 이루기 때문에 성벽의 외부를 손질하는 정도로 쌓았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성벽 기저부까지 남천의 물이 와 닿고 있다. 성안의 전체적인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성안 지반의 높이는 성밖보다 약 7m가 높고, 남천을 접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성벽은 약간 높은 언덕과 같이 토루가 둘러져 있다. 현재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국립경주박물관과 연접한 곳인 동남쪽으로 약 10~18m가 된다. 성의 규모는 동서 860m, 남북 250m, 성 전체 둘레는 1841m, 면적은 1830.600m2이다. 월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일제강점기시대와 1979과 1980년에 부분적인 발굴을 하였던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월정교 부근의 성벽을 조사하였는데, 성벽의 너비는 36척(10.9m), 높이는 중앙에서 12척(306m) 내외였다고 한다. 또한 성벽 밑은 김해식 토기를 포함한 철기시대 문화층이 있었다. 1979~1980년에 있었던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은 월지로 통하는 동북문지로 토성의 기단부 석렬과 구조물에 대한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원래 월성 안에는 남문과 정문격인 귀정문, 북문, 인화문, 현덕문, 무평문, 준례문 등의 문과 월상루, 망덕루, 명학루, 고루 등의 누각, 왕이 정사를 보던 남당, 신하의 조하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 양궁, 사량궁, 대궁을 관할하던 새성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추정될 뿐이다. 월성에는 호공과 석탈해, 비담과 염종의 난 때에 김유신과 김춘추가 이곳을 근거지로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경덕왕과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등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월성 안에는 경주 석씨의 시조를 모시던 숭신전도 있었으나 1980년 동천동 석탈해왕릉 동남쪽으로 옮겼다. 동쪽의 명활성, 서쪽의 서형산성, 남쪽의 남산신성, 북쪽의 북형산성이 나성의 역할을 하였다. 월성 주위에는 사방으로 해자가 둘러져 있어 성을 호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월성 내부와 해자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 중에 있어 멀지 않아 그 전모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월성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월성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월성 안에서 조선시대의 경복궁 근정전처럼 임금님이 정사를 보던 중심 건물인 조원전은 어디에 있었을까 추정해 보세요. 그곳으로 추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를 기록하세요.

3

과제

월성 안 발굴현장 서남쪽에서 그림의 유적을 찾아보세요. 어떤 유물일까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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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경주 석빙고  

(보물 제66호)

경주 석빙고

월성 북쪽 성루 중간 지점에 성루를 자르고 남쪽에 입구를 내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이 경사지게 하여 물을 성 밖으로 배출하도록 설치돼 있는데, 보물 제66호이다. 내부는 동서로 무지개 구조[홍예]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의 천장에는 세 곳에 배기공을 설치하였다. 출입구 높이는 1.8m, 너비 2.0m의 크기로 만들고, 계단을 설치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대 유리왕 때부터 얼음 창고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신라시대에는 일찍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서도 근래에 얼음저장고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월성에 있는 현재의 석빙고에 대해서는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설과 조선시대 축조설로 나눌 수 있다. 신라시대 축조설은 일제강점기시대 일본인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고, 조선시대 축조설은 1960년대에 이화여대 진홍섭 교수에 의해 제기되었다. 진홍섭 교수는 조선시대에 이곳에 석빙고를 설치한 이유로 첫째, 성 남쪽에 남천이 흐르고 있어 채빙하기에 편하다는 점, 둘째, 성루의 경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 셋째, 전체적인 구조와 설계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도 석빙고, 대구광역시 기상대 내에 있는 석빙고비명, 안동 석빙고, 경남 창녕읍 석빙고 등과 같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축조년대를 알 수 없는 석빙고인 창녕군 영산면 석빙고, 달성군 현풍읍 석빙고 등을 예로 하면서 모두 조선시대로 축조연대를 추정했다.

경주 석빙고

<석빙고 내부 입구 계단>

아울러 경주의 석빙고도 경상북도, 경상남도의 석빙고와 마찬가지로 18세기 전반에 축조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이 석빙고 서쪽에 있는 석빙고 관련 비에 의하면 1738년(영조14년)에 당시 경주 부윤이던 조명겸이 나무로 된 얼음 창고[빙고]를 돌로 된 얼음 창고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석빙고 입구 이맛돌에는 “숭정기원후 재신유 이기 개축(崇貞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고 쓰여 있어 4년 뒤에 동쪽으로 100m 정도 옮겨 현재 위치에 다시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옮기기 전의 옛 위치는 서쪽에 남아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석빙고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석빙고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경주 석빙고는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인지, 아니면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인지 하나를 선택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기록하세요.

3

그림은 석빙고의 횡단면도와 석빙고 홍예 사진입니다. 무지개 구조[홍예]의 장점이 무엇일까를 토론하고 기록해 보세요.

과제

4

석빙고의 종단면도입니다. 위쪽 배기공은 왜 필요했는가를 기록하세요.

과제

5

그림은 석빙고의 평면도입니다. 이곳 경주 석빙고 출입구가 향하는 방향을 기록하세요.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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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경주 계림  

(사적 제19호)

경주 계림경주 반월성에서 첨성대로 내려가는 중간에 위치한 숲이다. 숲 가운데로 시냇물이 흐르고, 울창한 숲이지만 이곳의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아 옛모습 그대로이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60년(탈해왕 4년)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옆의 시림(始林)이 온통 환한 광명으로 차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자줏빛 구름이 하늘에서 그 숲속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 구름 속으로는 황금으로 된 궤(櫃)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그 나무에는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어 이 광경을 탈해왕에게 고하자 왕이 거동하여 궤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한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閼智)’라 했다. ‘알지’란 순우리말로 ‘아기’를 뜻한다. 탈해왕이 ‘알지’를 안고 궁으로 돌아와 태자로 삼았으나 알지는 왕위를 파사에게 양보했다. ‘알지’는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 그 후 ‘알지’의 6대손인 미추가 김씨로는 최초로 신라왕이 되었다. 현재 계림에는 약 100여 그루의 고목이 우거져 있으며, 1803년에 세운 비가 비각 속에 서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계림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계림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계림에 있는 비각에 있는 비는 언제 세워진 것인가를 조사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3

계림 속에 세워져 있는 향가비를 찾아 어떤 노래인지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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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경주 향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때 빼어난 유학자들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신라 신문왕 2년(682) 국학이 설치되었던 곳이라 한다.
그 뒤 1492년(성종 23) 경주부윤 최응현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대성전이 소실되어 위패를 도덕산 두덕암으로 옮겼다가 1600년(선조 33) 경주 부윤 이시발이 대성전과 전사청을 중건하고 위패를 다시 돌려 안치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부윤 이안눌이 명륜당을 중수하고 동서 양무를 중건하였으며, 1668년(현종 9)에 보수하였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전사청·내신문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는 5성인, 송나라 2현, 우리나라 18현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전교 1명과 장의 수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조선시대 선비들이 학습하던 명륜당 앞에서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향교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경주 향교가 가지는 구조상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3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은 어떤 관계인지 조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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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경주 최부자댁  

(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 최부자댁

경주 최씨 가암파[佳巖波 혹은 정무공파貞武公波]의 분파인 동파東派[혹은 가암삼파佳巖三派] 종가이다. 분파 시조인 송정 최동량(松亭 崔東亮 1598~1664)은 정무공의 셋째 아들이므로 삼파라고도 하고 내남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파라고 한다. 정무공 최진립(貞武公 崔震立 1568~1636) 이래 내남에 살고 있었는데, 최동량 때인 1644년에 이조리에서 고택 일부를 헐어 교촌에 옮겨 짓고 이사하게 되었다. 교촌에는 옆에 향교가 있음으로 해서 부잣집의 큰 저택이 들어서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둥을 30cm정도 잘라서 가옥의 높이는 향교 건물보다 높지 않도록 제한하는 세심함을 베풀어 겸허한 삶의 철학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이때 지어진 건물은 교동법주를 빚고 있는 가옥이다. 새집 후원 일대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비보수로 조성하여 향교 송단과 연결하였다. 최진립의 8세손인 용암 최기영(龍庵 崔祈永 1768~1834)의 장남 응서 최세린(應瑞 崔世麟 1791~1846)이 1831년에 현재의 최씨 고택 자리에 새로이 큰 집을 짓고 내남에서 이사하였다. 이때 동쪽에 인접한 향교보다 1m 이상 낮추어 터를 정지하였다. 또 향교와 담장이 닿지 않도록 사이에 하인들이 거주하는 가랍집을 지어 차단하였다. 원래 99칸이었다고 전하는데 사랑채, 안채, 사당, 문간채, 고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후 후손들은 앞쪽으로 분가하여 현재와 같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향교가 있는 곳이므로 행정단위로는 교동(校洞)이라 하지만 전통적으로 교촌(校村)이라 불러 왔기에 여기서도 이를 사용한다.

체험학습 과제

1

1-1. 경주 최부자댁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경주 최부자댁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교촌 경주 최씨 동파 종가댁에 전하는 여섯 가지 가르침[六家訓]이 있습니다. 이를 조사하여 적어보세요.

3

그림의 석조 유물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세요.
또 무엇에 쓰이던 유물인지를 생각해보세요.

경주 최부자댁

4

교촌 경주 최씨 동파 종가댁은 벼슬을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가훈이 내려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는데, 이렇게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한 이유는 무엇인지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5

“재산은 만석 이상의 재물을 모으지 말 것, 흉년이 들면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 것, 더하여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들 사실을 통해 집안 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무엇을 가르치고자 한 것일까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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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경주 월정교  

(사적 제457호)

월정교는 일정교와 함께, 『삼국사기』 경덕왕조의 “경덕왕 19년 2월 …… 궁의 남쪽 문천상에 춘양(春陽), 월정(月淨)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에 전하는 교량으로 판단되고 있다. 시대가 변천되면서 월정교(月淨橋)는 월정교(月精橋)로, 춘양교(春陽橋)는 일정교(日精橋)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들은 각각 달과 해의 정령을 상징하는 월정교와 일정교로 이름이 정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월정교는 남·북편 교대와 4개소의 주형 교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이는 약 60.57m로 추정되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편과 기와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교각 상면에 누각 건물 형태로 된 누교(樓橋)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2000년대 들어 복원하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월정교’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월정교’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월정교’ 다리발을 살펴보면 단면이 직사각형이 아니고 남천의 상류와 하류 방향으로 뾰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였을 때의 장점은 무엇인지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3

‘월정교’는 하류쪽으로 10여 m되는 곳에 나무로 된 다리를 나란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다리는 동시에 있었을까요? 동시에 있었다면 왜 두 개가 필요했을까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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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경주 첨성대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천문대(臺)로 알려져 있다. 석조 건축물로 높이는 9.5m이며 국보 제31호이다. 이 근방을 일반적으로 비두골 또는 비두거리 라고 하는데, 북두칠성에 다른 별을 비교해서 국가의 안위와 길흉화복을 점쳤다는 뜻이다.
구조면에서 살펴보면. 아래의 기단부, 병모양의 원통부, 다시 그 위의 정井자모양 돌로 된 정상부로 나눌 수 있다. 기단부 아래의 땅속에는 잡석과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이 기단부는 남쪽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o정도 돌아가 있는데, 이 방향은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방향과 일치한다.
또 13단에서 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cm되는 정사각형의 창구가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 속이 비어 있는 형태이다.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에 동서남북으로 2개씩의 긴 돌[장대석]이 걸쳐 있어 정井자모양을 이루고 있다. 27단의 원통부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인 정자석이 두 단에 걸쳐 놓여 있어서 정상부는 사각형을 이룬다. 현재로서는 남쪽면이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 8。 정도 돌아가 있다.
돌의 개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여 왔으나, 기단석까지를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1962년 12월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던 홍사준과 정영호, 유문룡 등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기단부를 제외한 1~27단까지가 362매, 지대석 8매, 기단석 12매, 상부 정자석 8매, 중간 정자석 8매, 남측 문기둥 2매, 27단의 판석 1매로서 도합 401매이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첨성대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첨성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첨성대를 왜 하필 원통형으로 만들었을까를 기록해 보세요.

3

첨성대와 다음 사항을 비교하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첫째, 주변의 나무들과 비교하면?
둘째, 신라시대에 주변 나무들의 높이는?
셋째, 첨성대의 높이가 이정도 돼야하는
이유는?

4

신라시대에 하늘을 관측하는 천문대가 갖춰야 할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세분하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첫째. 위치조건 :
둘째. 구조조건 :
셋째. 높이조건 :

5

첨성대는 천문관측에 사용되던 천문대인가, 아니면 하늘에 제사지내던 제단인가? 하나를 고르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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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경주 대릉원<천마총>  

(사적 제512호)

황남동 고분군의 발굴된 고분 중에서 유일하게 내부를 공개하고 있는 고분이 제155호인 천마총이다. 1973년 발굴과정에서 껴묻거리 가운데 말다래가 출토되었는데, 여기에는 날개 달린 말이 그려져 있어 천마총으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말다래[장니]란,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말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는 마구를 말한다.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는 자작나무껍질을 여러 겹 겹쳐 누벼서 만든 것이며, 국보 2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마총은 바닥의 지름이 47m, 높이가 12.7m인 원형봉토분이다.
천마총의 축조양식은 먼저 땅을 잘 고른 다음 바닥 위에 진흙을 깔고, 진흙층 위에 다시 냇돌을 깔았다. 그리고 냇돌층 위에는 나무 덧널을 설치했다. 나무 덧널 내부에 껴묻거리를 넣은 상자와 시체를 넣은 나무 널을 수직으로 내려 안치했다. 나무 덧널 위를 다시 냇돌을 쌓아 덮었고, 그 냇돌층을 다시 진흙을 발라 층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이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기에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라 한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천마총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천마총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그림

그림은 천마총을 발굴하면서 그린 동서 단면도입니다. 안쪽 돌이 고깔모양으로 무너져 내린 이유는 무엇인지 기록해 보세요.
또, 그림에서 봉분 흙이 안쪽으로 경사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기록해보세요.

 

3

2번 그림에서 봉분 흙이 안쪽으로 경사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기록해 보세요.

4

그림

그림은 돌무지덧널무덤인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나온 금관을 펼쳐 그린 그림입니다.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기록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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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경주 대릉원<황남대총>  

(사적 제512호)

경주 평지에 있는 고분 가운데서 98호분 황남대총과 155호분 천마총을 발굴하고 내부를 공개하는 과정에서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 대릉원이다. 대릉원 안에는 전.미추왕릉을 비롯한 20 여 개의 고분이 있고, 주변에는 정비할 당시 발굴한 고분들이 많다. 대릉원에는 1906년 처음으로 신라고분을 발굴한 100호분 검총도 있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황남대총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황남대총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그림

위 그림은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의 발굴도면이다. 아래 그림은 북분의 조성을 추정한 그림이다. 나무널과 나무덧널 및 봉분과의 관계를 기록해보세요.

3

대릉원에서 가장 큰 고분을 찾아보고 어느 것인지 이름을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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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경주 노서동 고분군  

(사적 제512호)

그림

중심도로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노서동이라 하고, 이곳에 있는 무덤들을 노서동고분군이라 한다. 노서동 고분군에는 1921년 신라무덤으로는 처음으로 금관이 출토되어 ‘황금의 나라 신라’라는 타이틀의 문을 연 금관총이 있다. 그 서쪽으로는 스웨덴의 황태자가 신혼여행으로 세계 일주를 하는 가운데 신라 금관을 발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 발굴된 금관은 꼭대기에 새 3마리가 있었으므로 ‘봉황(鳳凰)’의 ‘봉’과, 스웨덴의 한자말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합쳐 서봉총이라 이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발굴된 호우총이라는 무덤이 있는데요, 해방 후에 우리 손으로 발굴한 최초의 무덤이라서 의미가 있다. 청동호우(靑銅壺杅 청동으로 만든 그릇) 1개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기형상으로는 보통 합盒이라 부르는 것으로 이 호우의 밑바닥에 ‘을묘년 국강상광개토호태왕 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명문이 주조되어 있어 유명하다. 이 명문의 글씨 모양은 중국 집안에 있는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과 똑같고, 여기서의 ‘을묘년’이라는 연대는 광개토왕 사후 3년에 해당되는 415년(장수왕 3)으로 이 호우가 장수왕 3년에 광개토왕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청동호우가 출토되었으므로 호우총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쌍상총이나 마총처럼 석실분 무덤이 평지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도 아주 중요하다. 적석목곽분이 산지로 가면서 석실분으로 바뀌었다기 보다는 평지에서 이미 석실분이 나타나면서 무덤의 위치만 산기슭으로 옮겨갔다고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체험학습 과제

1

1-1. 해방 후에 우리 손으로 처음 발굴한 호우총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호우총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서봉총 발굴현장을 찾아가서, 서봉총의 어떤 특징을 2가지 이상 기록하세요.

3

그림은 돌무지덧널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위쪽 흙을 완전히 제거했을 때 모습입니다. 돌이 ㅁ자로 돌려지고, 가운데가 네모나게 움푹한 이유는 무엇일까 토론하고 기록해 보세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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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경주 노동동 고분군  

(사적 제512호)

경주시내 고분들 가운데서, 경주문화원에서 남쪽으로 나있는 도로의 동쪽에 있는 고분들을 일컫는 명칭이다. 이 도로가 조선시대 관아에서 남쪽으로 뻗은 중심도로이므로 이를 기준으로 노동과 노서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1921년 금관총을 발굴한 이후에 1924년에 발굴하여 두 번째로 금관이 출토되었으나 금관은 금관총의 대명사가 되었으므로 금방울[금령]을 대표적 유물로 정하고 금령총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금령총 금관은 천마총 금관과 같이 4단으로 되어 있으면서 곡옥이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무덤 상부에서는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주전자와 같은 용도를 가졌던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 토기는 말을 탄 주인상과 하인을 표현하였다고 판단되어 신라시대 말 장식 등을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유물이고, 기마인물형토기라고 부른다.
금령총 동쪽에는 금령총보다 좀 더 높게 무덤 흔적을 남기고 있는 고분이 있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금동신발[식리]이 특징이므로 식리총이라고 부른다. 노동동고분군 가운데는 무엇보다 경주분지고분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고분으로 봉황대라고 불리는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의 서북쪽에는 조선시대부터 성덕대왕신종이 일제강점기까지 성문을 열고 닫는 신호용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림

무덤의 호칭


  • 임금이나 왕비의 무덤으로 주인을 알고 있을 때 사용하는 말.
    예) 무열왕릉, 선덕여왕릉 등
  • 고 분
    주인이 알려진 왕릉이나 왕비릉을 제외한, 통일신라시대 이전의 재배층의 무덤을 일컫는 말.

  • 왕릉으로 추정되지만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어 고분에서 대표적인 유물이나 대표성을 사용하여 붙이는 말.
    예) 금관총, 천마총, 무용총, 장군총 등

 

체험학습 과제

1

1-1. 금령총과 식리총이 봉황대와 함께 나타나도록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금관총과 금령총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경주시내에 분포하는 무덤들의 이름을 부를 때, ‘고분(古墳)’이라는 이름과 ‘○○릉(陵)’,‘○○총(塚)’, ‘○○묘(墓)’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고분(古墳) :
 
○○릉(陵) :
 
○○총(塚) :
 
○○묘(墓) :

 

3

노동동 고분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을 봉황대고분이라고 부릅니다. ‘봉황대’라는 말의 의미를 토의하고, 무덤에 고목이 자라고 있는 점과 연결시켜 설명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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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신라 대종  

신라대종은 경주시에서 2016년에 성덕대왕신종을 지금은 타종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지금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서 모양을 같게 새로이 제작한 것이다. 규모나 조각 등에서 비슷하지만 정확하게 똑같다고는 할 수 없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신라대종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신라대종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의 각각 좌우, 네 곳에 조각된 조각상의 명칭을 기록하세요.

3

신라 대종과 같은 모양을 가진 대종으로 국립 경주박물관 안에 있는 종의 이름을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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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경주 쪽샘유적박굴관  

쪽샘유적발굴관은 신라고분 44호분을 발굴하는 과정을 일반인들에게 관람시키기 위해 고분 위에 지붕을 씌워 전시관처럼 만든 곳이다. 내부에서는 발굴작업이 계속 진행 중에 있어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생생하게 현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쪽샘 유적 중 고분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쪽샘유적발굴관 주변 경주평지에는 매우 많은 고분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숫자가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곳 전시관 역시 “44호분”이라고 합니다. 이런 숫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3

신라에서는 여러 형태의 무덤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 왔습니다. 전시관 안에서 무덤의 변화를 찾아 기록하세요. 또, 오늘날 산에 무덤을 쓰는 것과 같은 형식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기록하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