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코스 : 동남산과 왕경

[제1코스]불국토 남산에 어린 화랑도 정신과 함께 통일로 가는 길 !!! 동남산과 왕경

  • 화랑교육원~3 남산동석조감실[10]~5 헌강왕릉[10]~5 정강왕릉[10]~5 통일전[30]~5 서출지[10]~10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20]~10 (통일전주차장)⇒5 (화랑교)~10 (미륵곡 석조여래좌상)[15]~20 탑곡마애불상군[30]~20 불곡마애여래좌상[15]~20 상서장[20]~20 월성[10]~2 석빙고[10]~10 계림[10]~5 향교[10]~5 최부자댁[15]~5 월정교[7]~5 (교촌마을)~5 (교촌마을주차장)⇒15 화랑교육원

※ 도보 ~분 / 차량 ⇒분 / 유적지 내 체류 시간 [  ] / 중식 장소 밑줄

지도

답사 개요

  • 남산에는 많은 유적이 있어 ‘노천박물관’이라고도 불리 우는 데, 그 중에서 동남산 아랫 쪽에 분포하는 중요한 유적을 체험해 본다. 이 답사 길에서는 신라인들의 불상, 탑 등 불교문화와 능묘를 알아 볼 수 있다.(도보 이동 거리 약 11km)

유의 사항

  • 도로를 횡단하거나 따라 걷는 경우가 있으므로 교통규칙을 잘 지키고, 안전에 유의하도록 특히 주의합니다.
  • 점심과 물과 간식을 반드시 준비합니다.
  • 풀섶을 통과할 수도 있으므로 운동화에 긴바지를 착용합니다.
  • 유적 유물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 관찰합니다.
  • 의문은 인터넷이나 해설사를 이용하여 해결하도록 합니다.
  • 몸에 문제가 있을 때는 재빨리 인솔교사에게 말씀드려 해결을 합니다.
  • 발굴현장에서는 책임자의 허락을 받은 후에 관람합니다.

 

1. 경주 남산동석조감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호)

경주 남산동석조감실 화랑교육원 내에 자리잡고 있는 석조 감실(원래 집이나 방의 공간을 뜻하는 것으로, 건물보다는 작은 규모의 공 간)로 불상을 모셔두던 곳이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밑받침돌 위로 양쪽 옆면과 뒷면을 높이 세운 뒤 위로 덮개돌을 얹어 앞쪽 을 트이게 한 모습이다. 입구 바닥에는 불상을 받치던 길쭉 하고 둥근 연꽃무늬를 새긴 대좌가 놓여 있는데, 마치 깨어 진듯하나 감실의 내부 크기로 봤을 때 원래의 모습으로 보 인다. 통일신라시대에 이곳에 불상을 모셔두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감실의 높이는 2.5m, 내부 공간의 바닥 길이는 1m이다. 널따란 돌의 안쪽은 다듬어져 있고, 바깥쪽 면은 다듬지 않고 사용하였다. 인공적인 석굴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체험학습 과제

1 1-1. 남산동석조감실의 사진을 찍어보세요.
1-2. 남산동석조감실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2 만약 석불이 있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상상하여 내가 취한 포즈로 사진을 찍어 보세요.
3 감실의 용도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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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주 헌강왕릉  

(사적 제187호)

헌강왕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주인공인 48대 경문왕의 맏아들이다. 875년 경문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헌강왕이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한 번 보기만 해도 모두 입으로 읊을 수 있을 만큼 천성이 총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문치에 힘쓰며 876년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어 불경을 강하게 하였다.
879년(헌강왕 5) 일길찬 신홍이 모반의 혐의로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이 유지되었다. 자연재해도 일어나지 않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의 삶도 안정되었다. 『삼국사기』에는 880년 헌강왕이 음력 9월 9일에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금성에 민가가 즐비하고 곳곳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헌강왕 때에 바람과 비가 철마다 순조로워 금성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잇달아 있으며 초가는 하나도 없었고 거리마다 풍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회적 안정과 풍요로움을 누렸으나, 헌강왕은 중앙귀족들과 함께 향락적 귀족문화를 즐기는 데만 몰두하고 신라 하대 사회의 불안정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자 왕도 이를 따라서 춤을 추었는데, 이 춤을 어무상심이나 어무산신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헌강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에는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령이라 했으며, 동례전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에는 지신이 나와서 춤을 추었는데 이를 지백급간이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산신과 지신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춤을 추어 이를 경계하도록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더욱 향락에만 빠져 마침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고 헌강왕 때의 향락적 귀족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헌강왕과 관련된 이야기는 『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조에도 나온다. 대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산시 남구 황성동 외황룡강 하구)에 놀러 갔다가 동해용왕의 아들인 처용을 데려와서 왕은 미녀를 아내로 삼아주고 벼슬을 내렸다. 처용의 아내는 너무나 아름다웠으므로 역신이 그녀를 흠모하였다. 그래서 사람으로 변신하여 밤중에 처용의 집으로 가서 몰래 그 여자와 잤다. 처용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곧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다가 물러갔다.
그러자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고 처용에게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공이 화를 내지 않으시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깁니다. 맹세컨대 지금 이후로 공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모습을 그려 붙여 나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처용무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가면(악학궤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 처용무란 처용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을 말한다. 궁중무용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오방처용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헌강왕 때 살던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전염병을 옮기는 신) 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헌강왕릉

헌강왕릉 1993년 8월 장마에 도굴되었던 봉분이 내려앉아서 이를 복원, 보수하기 위해 경주문화재 연구소에서 유구 조사와 유물 확인을 한 적이 있었다. 능의 겉모양은, 아래쪽에 다듬은 돌을 4단으로 쌓아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는데 높이는 1m 된다. 밑 둘레는 50m이고 둘레돌을 합친 전체 높이는 4m인 원형봉토분이다. 현실은 남북 2.9m, 동서 2.7m이고, 현실벽은 비교적 큰 활석을 이용하여 궁륭형에 가까운 형태로 최상부에는 개석으로 장대석 2매를 나란히 덮었다. 2매의 판석으로 된 시상대는 길이 2.4m, 너비 0.7m이며, 발견된 두침과 족좌도 각각 1점뿐이었다. 무덤 속은 여러 차례의 도굴로 말미암아 학술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나무 부스러기가 조금 있었는데 과학적인 분석 처리를 한 결과 소나무, 굴참나무임이 드러났고, 그 밖에는 유리구슬 몇 개와 아주 가는 금실과 자그마한 금판, 토기 조각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이때에 조사된 바로는 그 석실 구조와 출토 유물은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이어서 이 왕들의 재위 시기인 9세기 말엽과는 큰 차이가 있다. 즉, 왕은 재위 12년에 돌아가시니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 보리사라는 절이 능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나, 신라 때에도 그곳이 보리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체험학습 과제

1

1-1. 헌강왕릉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헌강왕과 헌강왕릉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헌강왕 설화에 관련된 처용무의 동영상을 보고 왕릉 앞에서 처용무의 한 가지 동작을 사진을 찍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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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 1 조 2 번문제 2017.12.17 12:05:56 삭제

 

 

3. 경주 정강왕릉  

(사적 제186호)

정강왕

정강왕(? ~ 887, 재위: 886 ~ 887)은 신라의 제50대 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황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주인공인 48대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다. 정강왕은 형인 49대 헌강왕(?∼886, 재위 875∼886)이 재위 12년째인 886년 7월 5일에 사망한 후 헌강왕의 태자 김요(金嶢)가 아직 돌이 안 된 어린 나이였으므로, 김황이 신라 제50대 왕에 즉위하였다. 887년 1월에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마련해 왕 스스로도 행차하고 강의를 들었다. 같은 달, 한주(지금의 서울 도봉구 지역)의 이찬 김요(金蕘)가 반란을 일으키자 파병하여 김요를 죽였다. 여름 5월, 임금이 병이 들어 시중 준흥에게 말하였다. “나의 병이 위독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동생 만(曼)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장부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 가을 7월 5일,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정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시호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한 호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문무(왕), 성덕(왕), 충무공(이순신), 문창후(최치원)… 등이다.

백고좌

사자좌 백 개를 만들어 고승 백 명을 모시고 설법하는 큰 법회. 국가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하는 법회로 왕이 주관하여 열리는 호국적인 의미가 매우 깊은 법회이다. 신라 진흥왕 12년에 고구려에서 온 고승 혜량 법사가 처음으로 신라에 설치하였다는 것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백고좌 강회가 열리는 것은 보통, 왕이 병이 들었을 때, 외적의 침입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등 왕과 국가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이를 불교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정강왕릉

정강왕릉 원형봉토분으로 지름 15.7m, 높이 4m이 다. 봉분의 밑부분은 가공한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호석을 둘렀다. 가장 아랫단 장대석은 지대석처럼 약간 밖으로 내밀게 놓았고, 그 위 2단은 이보다 약간 들여쌓았다. 봉분의 전면에는 얕은 석단 위에 작은 석상이 놓여 있고, 석단에서 조금 떨어진 아랫부분에 장대석이 일렬로 놓여 있다. 『삼국사기』에 정강왕을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정강왕릉과 헌강왕릉의 북쪽에 보리사라는 절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보리사가 신라 때의 보리사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정강왕릉 가까운 북쪽에 헌강왕릉이 있는데 호석의 구조도 같은 형식인 이 헌강왕릉의 내부가 1993년 조사되었는데, 그 석실 구조와 출토 유물은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이어서 이 왕들의 재위 시기인 9세기 말엽과는 큰 차이가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정강왕릉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정강왕과 정강왕릉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슬프게 돌아가신 정강왕이 행복해 할 만한 포즈로 왕릉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3

이곳의 왕릉이 정강왕릉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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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주 통일전  

경주통일전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정신을 계승하고, 화랑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이를 이어받아 다가올 남북통일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하여 조성한 전각이다. 197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건립하였다. 통일전 경내에는 삼국통일의 주인공이었던 무열왕(29대), 문무왕(30대),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표주박 모양의 연못이 있고, 연못 위쪽에 화랑정이 있으며, 삼국통일 순국무명용사비가 있다. 첫 문인 흥국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태종무열왕인 김춘추 ․ 문무대왕인 김법민 ․ 태대각간 김유신의 사적비가 있다. 비문은 이선근이 썼으며 비의 모습은 무열왕릉에 있는 귀부(거북 모양의 비석받침)와 이수(뿔 없는 용의 서린 모양을 아로 새긴 형상의 비석 머릿돌)를 본 따고 있다. 맞은편에는 이은상이 쓴 삼국통일기념비가 있다.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를 모방한 계단을 오르면 서원문이 있는데, 이 문을 통해 통일전에 이른다. 통일전에는 왼쪽으로부터 무열왕 ․ 문무왕 ․ 김유신 등 3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두 왕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 김유신은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이다. 통일전 주위의 건물에는 김유신장군 출전도 등 통일의 격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기록화가 긴 회랑을 따라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10월 7일 10시에 통일서원제(통일을 기원하는 제사)를 하고 있는데 이날은 삼국통일전쟁 중 당나라와의 전투였던 매소성 전투의 승전일이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된 직후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에 설치한 최고 군정기관)를 두었다. 그러나 675년 9월 29일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거느린 20만 당나라군이 매초성에 웅거하여 신라를 위협하므로 신라군은 이를 공격하여 20만 대군을 격파했으며, 이 전투를 매소성 전투라 한다. 이 해에 신라군은 또 다른 여러 성에서 18회나 당나라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견디지 못하고 676년 2월에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만주)으로 옮겼다. 이로서 신라는 당나라까지 물리치고 명실상부한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통일전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통일전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매소성 전투에서 당나라군을 격파하는 신라 장수의 포즈로 사진을 찍어 보세요.

3

우리가 남북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를
2가지 이상 제시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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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주 서출지  

(사적 제138호)

경주 서출지일전 바로 남쪽에 아름다운 연못과 멋진 정자가 있다. 안내판의 글을 읽어보면 ‘서출지(書出池)’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풀어보면 글 서(書), 날 출(出), 그리고 못 지(池)이다. 즉, ‘글이 나온 연못’이라는 뜻으로, 이는 『삼국유사』기이편의 사금갑조에 실려 있는 설화이다. 신라 제21대 소지왕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소중히 여기는 아주 훌륭한 왕이었다. 소지왕(488) 때의 어느 날 소지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행차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까마귀와 쥐가 왕 앞에 나타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가 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왕이 한 신하를 시켜 따라가 보게 하였다. 신하는 까마귀 뒤를 따라가다가 피촌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두 마리의 큰 돼지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그 때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타나 웬 봉투를 내밀면서 “지금 즉시 이 봉투를 왕에게 전하라” 하고는 연못 속으로 사라졌다. 봉투의 겉봉을 보니 ‘개견이인사 불개일인사(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라고 씌어 있었다. 신하가 돌아와서 봉투를 바치자 왕은 봉투를 보고는 차라리 떼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열어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지혜 있는 일관(日官, 고대에 왕의 측근에서 천체를 살펴서 길흉을 가리는 일을 맡은 관직)이 왕에게 아뢰기를 “두 사람은 서민이고, 한 사람이란 왕을 뜻합니다.”라고 해석하면서 봉투를 열어볼 것을 청하였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봉투를 열자, ‘사금갑(射琴匣)’, 쏠 사(射), 거문고 금(琴), 상자 갑(匣), 즉 ‘거문고를 넣어두는 상자를 쏴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왕이 활로 거문고갑을 쏘니 그 안에서 궁주와 내통하던 궁의 승려가 있었다. 이에 왕은 두 사람을 처형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신라에서는 까마귀로 인해서 역모를 모면했다고 하여 정월 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까마귀에게 밥을 주었다. 또 노인이 나와서 편지를 전해준 연못을 서출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사건은 쥐와 까마귀 등으로 대표되는 재래의 신앙집단과 불교와의 충돌로 이해되고 있다. 즉, 이 서출지의 사건은 아직 신라에 유입된 불교가 정식 종교로 인정되지 않았던 소지왕대에 발생한 종교적 대립이며, 원래의 토착신앙 집단이 신라에 뿌리를 내리려는 불교 세력을 밀어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전래

  • 고구려
    372년(소수림왕 2년) 전진왕 부견이 순도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하게 했다. .
  • 백 제
    384년(침류왕 1년) 인도의 고승인 마라난타가 동진을 거쳐 들어옴으로써 불교가 전래되었다.
  • 신 라
    눌지왕(411~457) 때 고구려 승려인 묵호자가 신라의 서북지방인 일선군 (지금의 선산)에 들어옴으로써 전파되기 시작했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국교 화하기 위한 시도를 하지만 토착 종교를 믿는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를 거듭 하다가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로 528년에 국교로 공인되었다. 신라 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140~150여 년 늦게 불교가 공인되었다.

이요당

조선 현종 5년(1664) 이곳에 정착한 풍천 임씨 ‘임적’이라는 사람이 서출지에 정자를 지어 이요당(二樂堂)이라 하고 공부하는 장소를 삼으면서 또한 시를 읊고 경치를 즐긴 곳이다. 이요당은 서출지 내력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 건축 양식이 특이하고 우아하여 서출지를 더 아름답게 해주는 정자이다. 연못 쪽의 기둥들을 물 위에 배치하여 마치 정자가 연못에 떠 있는 것처럼 꾸민 멋진 건물로써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했던 우리 선조들의 멋과 지혜가 눈에 보인다.

이요당의 의미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 중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즉 이요당은 산과 물 두 가지를 다 즐기며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 노니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요당의 배치를 보면 뒤로는 아름다운 남산 줄기가 감싸고 있고, 앞에는 연못이 펼쳐져 있어서 군자의 거처를 뜻한다.(樂 : 즐길 락, 좋아할 요, 음악 악)

체험학습 과제

1

1-1. 서출지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서출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서출지 못 둑에 있는 백일홍(배롱)나무나 소나무를 배경으로 친구들과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어 보세요.

3

사금갑 설화와 관련되어 현재까지 전하는 풍속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예를 들고 설명해 보세요.

4

이요당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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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보물 124호)

화랑교육원에서 남쪽으로 1500m 정도 가면 남산동의 탑 마을에 서로 모양이 다른 석탑 2개가 동서로 배치되어 있다. 탑이 있다는 것은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절의 옛 이름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따서 즉, 남산동에 있는 절터라는 의미로 ‘남산동사지’로 불리고 있다. 고려 중기 일연스님의 서명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양피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 동네 사람들은 탑의 동쪽에 있는 못을 ‘양피지’ 또는 ‘양피못이라고 부르고 있어서 쌍으로 된 탑이 있는 이곳이 바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양피사’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보통 신라시대의 탑은 동서로 2개가 배치될 경우 양쪽의 모양이 같은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남산동사지에는 삼층이지만 모양이 서로 다른 탑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런 탑의 형태는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의 경우처럼 매우 드문 것이다.

동탑

전형적인 신라 양식과는 달리 모전석탑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탑신부의 몸돌에는 기둥을 새기지 않았고, 지붕돌 층급받침뿐만 아니라 위 낙수면에도 다섯 개의 층급받침을 둔 점, 그리고 기단부가 8매의 큰 돌로 짜여진 점이 바로 모전석탑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모전석탑’이란 바로 ‘벽돌 탑을 모방한 석탑’을 말한다. 기단부 여덟 개의 돌들은 크기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돌과 돌이 연결되는 선이 십자형을 벗어나고 있으며, 어쩌다가 십자형으로 조립된 기단의 남쪽 면에는 돌 이음이 만나는 지점에 직사각형의 홈을 파서 십자 모양의 단조로운 선이 생기는 것을 피한 조형의 아이디어가 엿보인다.

동탑

서탑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세운 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 양식으로, 상층 기단에는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신중을 조각하였다. 이러한 팔부신중은 단순히 탑의 장식에만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것으로 팔부신중은 바로 부처세계를 지키는 ‘수호신’인 것이다. 양식이 다른 두 개의 탑을 한 쌍으로 조성한 것은 또 하나의 멋진 구상이다.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의 조성도 이러한 경우라 하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쌍탑은 그 모양을 같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탑의 종류

탑은 만든 재료에 따라 분류하는데, 크게 나누어 목탑, 전탑, 석탑 등이다.

  • 목탑(木塔) 은 나무로 만든 탑을 말하는데, 불에 약한 단점이 있으나 크게 지어 올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황룡사구층목탑은 신라의 대표적인 목탑이다. 일본은 많은 목탑을 가지고 있다.
  • 전탑(塼塔) 은 벽돌을 쌓아 만든 탑이다. 원래 인도와 중국은 전탑을 많이 건립하였는 데 거대한 크기의 탑이나 높은 탑을 지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 전탑을 건립했으며 특히 안동지역에 여러 기가 남아 있다.
  • 석탑(石塔) 은 돌을 재료로 한 탑이다. 석탑은 우리나라 탑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지금도 잘 남아 있어 한국을 '석탑의 나라'라고 할 정도이다. 우리의 석탑 속에 는 전탑과 목탑의 흔적이 배어 있다. 한 예가 전탑을 모방한 석탑 즉, 모전석탑(模塼石塔)의 출현인데, 경주에는 분황사 모전석탑, 이곳의 동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몇 군데에 남아 있다.

탑의 의미

탑은 고대에 들어온 외래어이다. 석가모니가 인도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고 화장을 해서 나온 사리를 8개 나라에 나누었다. 이들 나라에서는 각각 무덤을 만들어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였다. 이렇게 사리를 봉안한 곳을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범어)로 스투파(Stũpa)라 하는데 이 말이 중국에 와서 ‘탑파’로 음역된 것이 더욱 줄어서 ‘탑’이 된 것이다. 즉,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기 때문에 초기 불교에서는 불상보다 탑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부처님 사리보다 훨씬 많은 탑들이 세워지게 되자 탑에 불경, 불상, 탑 등 중요한 물건들을 탑 속에 안치하게 되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동·서 삼층석탑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동·서 삼층석탑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서탑의 팔부신중 중에서 남쪽면의 오른편(탑 기준)에 있는 것은 얼굴이 3개고 팔이 8개 인 아수라도의 왕인 아수라이다. 4명이 1조가 되어 그 모습을 표현한 사진을 찍어 보세요.

동탑

3

두 탑을 비교하여 서로 다른 점(석탑과 모전석탑의 차이점)을 찾아보세요.

4

절에는 왜 탑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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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136호)

남산에 있는 불상 중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불상 중 하나로 원만한 얼굴과 유려한 옷자락, 화려한 광배는 통일신라시대 완숙기에 접어든 조각 솜씨를 보여준다. 전체 높이는 4.36m, 불상 높이는 2.44m이다. 연화대좌, 불꽃 모양의 광배, 항마촉지인과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을 하고 있다. 머리는 크고 어깨는 약간 움츠렸으며, 신체의 비율 등 8세기 중엽의 완전한 석굴암 불상에서 9세기 양식으로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구비한 이 불상은 본질적으로는 석굴암본존불과 흡사하지만 상당히 형식화된 불상이기도 하다. 이것은 8세기 불상의 이상형에서부터 9세기 양식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항마촉지인의 손이나 팔은 연약하게 표현되었으며, 하체는 다소 딱딱하게 처리되었다. 광배는 두광·신광을 마련하였는데, 신광과 두광 안에는 화불이 배치되었으며, 바깥쪽에는 화염문(불꽃 무늬)이 유려하게 올라가고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항마촉지인상을 하고 있기에 석가여래로 볼 수도 있으나 신라시대의 불상은 수인에 일정한 규정 없이 자유롭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으며, 광배 뒷면에 새겨진 마애불이 동방유리광세계의 약사여래이므로 그 반대편의 세계 즉, 서방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로 보인다. 광배 뒷면에는 약사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특이한 예이다. 불상 높이가 1.27m이고,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고 왼손은 약그릇을 들어 무릎 위에 얹은 모습이다.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구름 위에 높게 앉은 이 불상은 왼손에 약그릇을 들었기 때문에 동방 유리광 세계를 제도하는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화불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변화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보관에 화불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 불상에서처럼 광배에 화불을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석조여래좌상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석조여래좌상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다리는 결가부좌,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불상의 모습으로 자세를 취해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3

광배에 새겨진 화불은 몇 분인지 찾아봅시다. 하나의 불상에 또 다른 여러 부처를 새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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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보물 제201호)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에는 남산에 있는 불교유적 중 가장 많은 조각을 갖고 있다. 이곳의 큰 바위를 부처바위라 하는데 높이 약 9m, 둘레 약 30m이며 큰 바위 사면에 여래상, 보살상, 비천상, 승상, 신장상, 탑, 사자 등 34점을 새겨 사방불정토를 나타내었다. 이 사찰은 통일신라시대의 신인사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거대한 바위에 불상 ·보살·비천과 탑 등 화려한 조각을 회화적으로 배치하여 만다라적인 구조를 보여 주는 것은 한국에서는 유일한 조각군이라 할 수 있다.

북면의 목탑 조각 등

북면에는 동·서의 쌍탑이 조각되어 있는데 동탑은 9층탑이며 서탑은 7층탑이다. 모두 2 층 기단인데 처마 끝에 풍탁을 달았으며 이 것은 당시의 목조탑의 모형일 것임에 틀림 없다. 각 탑 아래에는 사자를 조각하였는데, 뛰고 있는 자세를 잘 포착하여 생동감 있게 표현 하였다. 두 탑 사이에 동면과 서면의 본존불 과 흡사한 불상이 조각되었고, 불상의 머리 위에는 보개(덮개)가 새겨져 있다. 또한 동탑 위에는 비천상 2구가 날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 목탑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황룡사 구층탑은 1238년 몽고군에 의 해 불탔다. 황룡사 목탑을 복원할 수 있는 근 거가 북쪽에 새겨진 9층 마애탑이다.

북면의 목탑

동면의 조각상들

동면은 세 개의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 제일 큰 바위면의 연화대좌 위에 본존불과 왼쪽에 합장한 보살상이 있으며, 그 아래에 향로를 공양하고 있는 스님 형상이 있는데, 이들의 주위로 7구의 비천상이 표현되었다. 본존의 미소 띤 둥근 얼굴, 거칠고 엉성한 법의 표현과 손을 가리는 옷자락, 그리고 특징적인 큰 연화좌와 연화문과 국화문의 중판연화문 기와와 흡사한 두광 등은 다른 상들과 공통된 수법이며, 이런 점은 바로 남산 탑골 조각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 남쪽의 작은 바위면에는 두 그루의 나무 아래 본존과 비슷한 승려 좌상이 있고, 그 옆에는 신장상이 조각되었으나 마모되어 불명확하다.

동면의 조각상

남면의 불상 등

남쪽은 다른 3면에 비해서 높은 대지인데 여기에는 목조 건물 유구들이 남아 있고 탑·석등의 유품들이 흩어져 있어서 이 남면불상을 주존으로 삼아 남향 사찰을 경영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면암의 동쪽에는 4각형의 감실을 마련하고 삼존을 조각하였다. 모두 몹 시 닳아서 세부 조각수법은 잘 알 수 없지만 대체적인 양식은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본존은 신체나 의문 등이 엉성하여 전대와는 다른 형식화의 경 향이 보이지만, 흔연히 웃고 있는 둥근 얼굴, 부드럽게 흐르는 어깨의 선도 물론 훌륭하며, 특히 왼쪽 보살은 본존에게 은밀히 귓속말을 듣는 시늉을 하며 전체적으로 율동감을 주고 있다. 이 불상들의 광배는 부챗살 같은 원형 두광이며 대좌는 연화대이다. 왼쪽 암면의 하단부에도 형식적 감을 파고 대좌도 광배도 없는 미완성 여래상을 조각했는데 오른쪽 삼존의 본존불과 흡사하다. 또한 이 탑골 마애조상군의 정면에 해당하는 남면 왼쪽에는 석조여래입상 1구가 있다. 이 불상은 마애불의 조각수법과 달리 신체의 양감 표현을 강조하였으며 밀착된 법의 표현이 특징적이다. 그 앞의 바닥 바위에도 스님 모습을 조각했는데 우아한 얼굴이며 엉성한 의문 등 역시 동일한 수법이다.

남면의불상

서면의 여래상 등

서면에는 역시 동면 본존과 흡사한 여래좌상이 있는데 다른 삼면과 달리 보주형 두광이 있고 조각기법이 약간 더 우아하다는 것이 다르다. 양 옆에 두 그루의 나무(보리수)가 있고, 두광 위에는 비천상이 날고 있다.

서면의 여래상

신라의 사방불 신앙

신라인들은 부처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어디에나 존재하고 함께 있다고 믿었으며 이 부처바위에도 사방에 부처가 새겨져 있다. 불교의 경전에 따라 동서남북에 모시는 부처가 일치하지 않으나 신라는 이들 여러 가지 유형을 재구성하였다. 즉, 동방에 약사여래, 남방에 미륵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방에 석가모니불로 배치하고 중앙에는 보이지 않지만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상징적으로 내포한 하나의 불국토를 표현한 것이 신라의 사방불이다.

산악신앙

‘산악신앙’ 혹은 ‘산악숭배’라고도 한다. 산악신앙은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 하나는 산 자체를 인격화하여 그 양감 · 위엄 · 수려 · 운무, 암석의 낙하, 기묘한 소리, 메아리, 화산폭발 등을 두려워하고 존숭하는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산에 있다고 믿어지는 신령, 즉 산신에 대한 경외심에서이다. 왜 경주 남산에 1백여 체에 가까운 부처님을 만들었을까? 신라 사람들은 경주남산을 부처님의 나라(수미산)로 생각했다. 그래서 옛날부터 있었던 산악에 대한 신앙이 불교의 전파와 함께 자연스럽게 남산바위에 불상, 탑 등을 만들게 되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탑곡 마애불상군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탑곡 마애불상군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동면에 조각된 조각상을 모두 찾아보세요.

3

부처바위의 사면에 불상을 조각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4

북면에 있는 탑의 조각은 오늘날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5

북면의 탑 아래에 사자 한 쌍이 있는데 서로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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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198호)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남산 동쪽 기슭인 불곡(부처골)의 한 바위에다 깊이가 1m 정도 되는 감실을 파고 거기에 불상을 새긴 마애불이 있다. 이 불상을 감실 속에 있다고 하여 감실불이라고도 한다. 주위에 흩어진 기와와 바위의 가구 흔적으로 보아 목조전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따라서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마애석굴 형태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불상은 머리에 두건처럼 생긴 것을 귀까지 덮어 쓰고 있다. 후대의 나한상에서 보는 것과 유사하지만 얕은 육계라든지 부드러운 굴곡 등은 그것들과 큰 차이가 있다. 얼굴은 둥글고 약간 이마를 숙였는데 알맞은 양감에 도드라진 눈, 깊이 판 입가 등으로 고졸하고 내면적인 미소가 만면에 번지고 있다. 이러한 조각은 삼국시대의 특징이다. 모든 점에서 인왕동의 석불좌상과 유사하지만 이 불상은 확실히 여성적이며 그래서 보살적인 인상이 짙다. 여기 부은 듯한 눈은 장창곡삼존불 등 고식 불상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삼도가 없는 목도 마찬가지이다. 어깨는 반듯하지만 우아하며 비록 옷에 싸였으나 몸의 율동감이 제법 여실하다. 여기에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있어서 전체적인 자세가 아름답고 공손스런 여성의 그것으로 변해 있다. 무릎은 낮고 수평적인데다 오른발이 유난히 크다. 이런 비사실적인 수법은 공손한 자세와 더불어 고격을 더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오른쪽 어깨와 왼쪽 무릎이 깨어진 외에는 완전한 불상이다. 통견의 법의는 묵직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신체의 굴곡을 감출 만큼 투박스럽지는 않다. 의문(옷 무늬)은 선모양이며 가슴 양쪽의 굵직한 철선은 특징적이다. 무릎에서 내려오는 의문은 상현좌를 만들고 있는데 2단으로 된 옷 주름은 비록 짤막하긴 하여도 유려하게 흐르고 있다. 광배는 따로 마련되지 않았다.

체험학습 과제

1

1-1. 불곡 마애여래좌상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불곡 마애여래좌상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석불에 채색을 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채색의 흔적을 찾아보세요.

3

우리나라 석굴사원은 어디어디에 있을까요?

4

불상의 전체적인 느낌을 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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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상서장  

(경상북도기념물 제46호)

상서장

남산 왕정골에 위치하고 있는 상서장은 신라시대 문신 최치원 선생이 진성여왕에게 나라를 바르게 하는 방법을 적은 ‘시무십조’를 올렸던 곳이다. 고려 현종 때 최치원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문창후에 봉하고 최치원 선생이 머물려 공부하던 이곳을 왕에게 글을 올린 집이라는 뜻으로 상서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뒤 고려 말에 최치원 상서장 유허비가 세워졌다. 그 뒤 상서장은 차츰 허물어졌고 지금의 건물들은 최근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현재 이곳에는 영정각, 상서장, 추모문, 전시관 등이 건립되어 있고, 조선 고종 때 건립된 비가 남아 있다. 지금은 최치원의 초상화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최치원

최치원(857~?)은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는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6년 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했다. 이 시기의 당나라는 ‘황소의 난’이 일어나는 등 나라가 어지러웠다.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이 쓰인 것은 이 때의 일이다. 고변은 황소가 장악한 모든 지역에 이 글을 뿌렸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후 최치원은 28세 때 귀국을 결정하였다.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이에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해 얻은 바가 많아서 자신의 뜻을 펼치려 하였으나 신라가 쇠퇴하는 때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될 수 없었다. 그 무렵 신라는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진성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하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6두품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그는 수많은 저서를 썼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뿐이며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비문’은 그의 필체가 남아 있는 것이다..

시무십조

시무란 그 시대에 당면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일을 말한다.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 10여 가지는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의 집권체제가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문제점이 심화됨에 따라 이를 해결해 보고자 하였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데에는 진골귀족들의 반발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무책의 정신은 고려왕조가 성립되고 사회가 안정을 되찾아갈 무렵인 982년 고려 성종에게 올린 최승로의 상소문 중 ‘시무 28조’로 계승되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상서장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상서장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제목을 『나의 시무2(3, 4, 5…)조』로 해서, 나의 어떤 점이 바뀌어야 하는지를 시무2조 이상으로 표현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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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경주 월성  

(사적 제16호)

경주 월성

월지 서남편에 있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왕궁이었으며 사적 제16호이다. 흙과 돌로 쌓은 도성으로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건물지가 있다. 이러한 신월성은 경주 시가지를 중심으로 보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주시 인왕동 449-2번지이다. 남천(문천 또는 사천) 북쪽에 접한 낮은 언덕을 연결하고 자연 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성곽의 형태가 반월형(사실은 초승달 모양)을 이루고 있다. 동쪽, 서쪽, 북쪽은 낮은 12개의 산봉을 연결하여 쌓았고, 남쪽은 자연 지세를 많이 활용하여 쌓았는데, 지형이 절벽을 이루기 때문에 성벽의 외부를 손질하는 정도로 쌓았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성벽 기저부까지 남천의 물이 와 닿고 있다. 성안의 전체적인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성안 지반의 높이는 성밖보다 약 7m가 높고, 남천을 접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성벽은 약간 높은 언덕과 같이 토루가 둘러져 있다. 현재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국립경주박물관과 연접한 곳인 동남쪽으로 약 10~18m가 된다. 성의 규모는 동서 860m, 남북 250m, 성 전체 둘레는 1841m, 면적은 1830.600m2이다. 월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일제강점기시대와 1979과 1980년에 부분적인 발굴을 하였던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월정교 부근의 성벽을 조사하였는데, 성벽의 너비는 36척(10.9m), 높이는 중앙에서 12척(306m) 내외였다고 한다. 또한 성벽 밑은 김해식 토기를 포함한 철기시대 문화층이 있었다. 1979~1980년에 있었던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은 월지로 통하는 동북문지로 토성의 기단부 석렬과 구조물에 대한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원래 월성 안에는 남문과 정문격인 귀정문, 북문, 인화문, 현덕문, 무평문, 준례문 등의 문과 월상루, 망덕루, 명학루, 고루 등의 누각, 왕이 정사를 보던 남당, 신하의 조하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 양궁, 사량궁, 대궁을 관할하던 새성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추정될 뿐이다. 월성에는 호공과 석탈해, 비담과 염종의 난 때에 김유신과 김춘추가 이곳을 근거지로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경덕왕과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등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월성 안에는 경주 석씨의 시조를 모시던 숭신전도 있었으나 1980년 동천동 석탈해왕릉 동남쪽으로 옮겼다. 동쪽의 명활성, 서쪽의 서형산성, 남쪽의 남산신성, 북쪽의 북형산성이 나성의 역할을 하였다. 월성 주위에는 사방으로 해자가 둘러져 있어 성을 호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월성 내부와 해자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 중에 있어 멀지 않아 그 전모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월성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월성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월성 안에서 조선시대의 경복궁 근정전처럼 임금님이 정사를 보던 중심 건물인 조원전은 어디에 있었을까 추정해 보세요. 그곳으로 추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를 기록하세요.

3

과제

월성 안 발굴현장 서남쪽에서 그림의 유적을 찾아보세요. 어떤 유물일까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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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경주 석빙고  

(보물 제66호)

경주 석빙고

월성 북쪽 성루 중간 지점에 성루를 자르고 남쪽에 입구를 내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이 경사지게 하여 물을 성 밖으로 배출하도록 설치돼 있는데, 보물 제66호이다. 내부는 동서로 무지개 구조[홍예]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의 천장에는 세 곳에 배기공을 설치하였다. 출입구 높이는 1.8m, 너비 2.0m의 크기로 만들고, 계단을 설치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대 유리왕 때부터 얼음 창고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신라시대에는 일찍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서도 근래에 얼음저장고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월성에 있는 현재의 석빙고에 대해서는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설과 조선시대 축조설로 나눌 수 있다. 신라시대 축조설은 일제강점기시대 일본인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고, 조선시대 축조설은 1960년대에 이화여대 진홍섭 교수에 의해 제기되었다. 진홍섭 교수는 조선시대에 이곳에 석빙고를 설치한 이유로 첫째, 성 남쪽에 남천이 흐르고 있어 채빙하기에 편하다는 점, 둘째, 성루의 경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 셋째, 전체적인 구조와 설계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도 석빙고, 대구광역시 기상대 내에 있는 석빙고비명, 안동 석빙고, 경남 창녕읍 석빙고 등과 같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축조년대를 알 수 없는 석빙고인 창녕군 영산면 석빙고, 달성군 현풍읍 석빙고 등을 예로 하면서 모두 조선시대로 축조연대를 추정했다.

경주 석빙고

<석빙고 내부 입구 계단>

아울러 경주의 석빙고도 경상북도, 경상남도의 석빙고와 마찬가지로 18세기 전반에 축조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이 석빙고 서쪽에 있는 석빙고 관련 비에 의하면 1738년(영조14년)에 당시 경주 부윤이던 조명겸이 나무로 된 얼음 창고[빙고]를 돌로 된 얼음 창고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석빙고 입구 이맛돌에는 “숭정기원후 재신유 이기 개축(崇貞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고 쓰여 있어 4년 뒤에 동쪽으로 100m 정도 옮겨 현재 위치에 다시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옮기기 전의 옛 위치는 서쪽에 남아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석빙고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석빙고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경주 석빙고는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인지, 아니면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인지 하나를 선택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기록하세요.

3

그림은 석빙고의 횡단면도와 석빙고 홍예 사진입니다. 무지개 구조[홍예]의 장점이 무엇일까를 토론하고 기록해 보세요.

과제

4

석빙고의 종단면도입니다. 위쪽 배기공은 왜 필요했는가를 기록하세요.

과제

5

그림은 석빙고의 평면도입니다. 이곳 경주 석빙고 출입구가 향하는 방향을 기록하세요.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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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경주 계림  

(사적 제19호)

경주 계림경주 반월성에서 첨성대로 내려가는 중간에 위치한 숲이다. 숲 가운데로 시냇물이 흐르고, 울창한 숲이지만 이곳의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아 옛모습 그대로이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60년(탈해왕 4년)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옆의 시림(始林)이 온통 환한 광명으로 차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자줏빛 구름이 하늘에서 그 숲속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 구름 속으로는 황금으로 된 궤(櫃)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그 나무에는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어 이 광경을 탈해왕에게 고하자 왕이 거동하여 궤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한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閼智)’라 했다. ‘알지’란 순우리말로 ‘아기’를 뜻한다. 탈해왕이 ‘알지’를 안고 궁으로 돌아와 태자로 삼았으나 알지는 왕위를 파사에게 양보했다. ‘알지’는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 그 후 ‘알지’의 6대손인 미추가 김씨로는 최초로 신라왕이 되었다. 현재 계림에는 약 100여 그루의 고목이 우거져 있으며, 1803년에 세운 비가 비각 속에 서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계림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계림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계림에 있는 비각에 있는 비는 언제 세워진 것인가를 조사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3

계림 속에 세워져 있는 향가비를 찾아 어떤 노래인지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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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경주 향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때 빼어난 유학자들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신라 신문왕 2년(682) 국학이 설치되었던 곳이라 한다. 그 뒤 1492년(성종 23) 경주부윤 최응현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대성전이 소실되어 위패를 도덕산 두덕암으로 옮겼다가 1600년(선조 33) 경주 부윤 이시발이 대성전과 전사청을 중건하고 위패를 다시 돌려 안치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부윤 이안눌이 명륜당을 중수하고 동서 양무를 중건하였으며, 1668년(현종 9)에 보수하였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전사청·내신문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는 5성인, 송나라 2현, 우리나라 18현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전교 1명과 장의 수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조선시대 선비들이 학습하던 명륜당 앞에서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향교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경주 향교가 가지는 구조상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3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은 어떤 관계인지 조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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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경주 최부자댁  

(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 최부자댁

경주 최씨 가암파[佳巖波 혹은 정무공파貞武公波]의 분파인 동파東派[혹은 가암삼파佳巖三派] 종가이다. 분파 시조인 송정 최동량(松亭 崔東亮 1598~1664)은 정무공의 셋째 아들이므로 삼파라고도 하고 내남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파라고 한다. 정무공 최진립(貞武公 崔震立 1568~1636) 이래 내남에 살고 있었는데, 최동량 때인 1644년에 이조리에서 고택 일부를 헐어 교촌에 옮겨 짓고 이사하게 되었다. 교촌에는 옆에 향교가 있음으로 해서 부잣집의 큰 저택이 들어서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둥을 30cm정도 잘라서 가옥의 높이는 향교 건물보다 높지 않도록 제한하는 세심함을 베풀어 겸허한 삶의 철학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이때 지어진 건물은 교동법주를 빚고 있는 가옥이다. 새집 후원 일대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비보수로 조성하여 향교 송단과 연결하였다. 최진립의 8세손인 용암 최기영(龍庵 崔祈永 1768~1834)의 장남 응서 최세린(應瑞 崔世麟 1791~1846)이 1831년에 현재의 최씨 고택 자리에 새로이 큰 집을 짓고 내남에서 이사하였다. 이때 동쪽에 인접한 향교보다 1m 이상 낮추어 터를 정지하였다. 또 향교와 담장이 닿지 않도록 사이에 하인들이 거주하는 가랍집을 지어 차단하였다. 원래 99칸이었다고 전하는데 사랑채, 안채, 사당, 문간채, 고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후 후손들은 앞쪽으로 분가하여 현재와 같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향교가 있는 곳이므로 행정단위로는 교동(校洞)이라 하지만 전통적으로 교촌(校村)이라 불러 왔기에 여기서도 이를 사용한다.

체험학습 과제

1

1-1. 경주 최부자댁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경주 최부자댁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교촌 경주 최씨 동파 종가댁에 전하는 여섯 가지 가르침[六家訓]이 있습니다. 이를 조사하여 적어보세요.

3

그림의 석조 유물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세요.
또 무엇에 쓰이던 유물인지를 생각해보세요.

경주 최부자댁

4

교촌 경주 최씨 동파 종가댁은 벼슬을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가훈이 내려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는데, 이렇게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한 이유는 무엇인지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5

“재산은 만석 이상의 재물을 모으지 말 것, 흉년이 들면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 것, 더하여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들 사실을 통해 집안 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무엇을 가르치고자 한 것일까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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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경주 월정교  

(사적 제457호)

월정교는 일정교와 함께, 『삼국사기』 경덕왕조의 “경덕왕 19년 2월 …… 궁의 남쪽 문천상에 춘양(春陽), 월정(月淨)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에 전하는 교량으로 판단되고 있다. 시대가 변천되면서 월정교(月淨橋)는 월정교(月精橋)로, 춘양교(春陽橋)는 일정교(日精橋)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들은 각각 달과 해의 정령을 상징하는 월정교와 일정교로 이름이 정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월정교는 남·북편 교대와 4개소의 주형 교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이는 약 60.57m로 추정되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편과 기와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교각 상면에 누각 건물 형태로 된 누교(樓橋)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2000년대 들어 복원하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월정교’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월정교’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월정교’ 다리발을 살펴보면 단면이 직사각형이 아니고 남천의 상류와 하류 방향으로 뾰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였을 때의 장점은 무엇인지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3

‘월정교’는 하류쪽으로 10여 m되는 곳에 나무로 된 다리를 나란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다리는 동시에 있었을까요? 동시에 있었다면 왜 두 개가 필요했을까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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